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희정당 (문단 편집) == 용도 == 희정당의 용도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현재 [[정설]]은 '[[왕]]의 침전인 [[대전]]이었다가 [[조선]] 후기 들어 나랏일 보는 편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며 대부분의 [[자료]]들도 그렇게 소개한다. 그러나 처음에도 침전으로 사용했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다. [[건물]] [[이름]]부터 그렇다. [[전통]] 건물의 경우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 및 용도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높은 위치부터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순으로 나간다. 즉 ‘전(殿)’이 가장 높으며 ‘당(堂)’이 그 다음 [[서열]]이다. 그런데 [[창덕궁]]의 [[중전|중궁]]으로 알려진 곳은 [[창덕궁 대조전|'대조'''전'''(大造'''殿''')']]이다. '''[[왕비]]의 침전이 ‘전(殿)’을 쓰는데 왕비보다 더 높은 [[임금]]의 정식 침전이 ‘당(堂)’이라는 것는 [[하극상|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물론 [[왕]]도 당을 쓸 수는 있다.[* 왕은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그 어떤 것도 쓸 수 있지만, 반대로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왕]]과, [[왕비]], [[대비]]와 [[상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전(殿)’은 절대 쓸 수 없었다. [[세자]]도 못쓰는 것이 원칙이나 [[창경궁 저승전]]과 [[경희궁 승휘전]]의 예처럼 아주 못 쓰지는 않았다.][* 왕이 기거하던 곳으로 전이 아닌 당을 쓴 대표적인 경우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머물던 건청궁 내의 장안당이 있다. 단, [[명성황후]]가 머물던 처소는 '당'보다 한단계 낮은 '합'을 쓴 곤녕합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왕비도 그에 맞추어 정식 처소의 이름을 당으로 써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건물]] 양식도 그렇다. 보통 일반적으로 정식 침전의 건물은 가운데에 출입하는 칸을 3칸 두고, 이 3칸 전면의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나와있으며 [[온돌|온돌방]]이 [[대청]]을 기준으로 좌, 우에 있다. 그러나 희정당의 경우 그렇지 않으며 [[지붕]]에 용마루가 존재하는데 이 역시 메인 침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설은 [[왕]]의 침전의 경우, 용(=왕)이 계신 곳 위에 불경스럽게 또 [[용]]이 누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기에 만들지 않았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고 때문에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의 관련성이 적혀있는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다. 이를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선진 인식이 많이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또한 [[연산군]] 때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꿀 당시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여기서 '''정사를 들을 뿐만 아니라''' 글을 닦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란 말을 한 기록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212008_002|#]] 이미 [[조선]] 초에 편전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궁궐지》에도 '[[창덕궁 대조전|대조전]] 남쪽에 있고 '''편전으로 시사를 하는 처소(熙政堂在大造殿南卽便殿視事之所也)'''”라 적혀있다. 그렇다하여 단순하게 편전 기능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희정당을 ‘협양문내선정전동(協陽門內宣政殿東) '''연침'''접군신지소('''燕寢'''接君臣之所)’, 즉 [[창덕궁 협양문|협양문]] 안 [[창덕궁 선정전|선정전]] 동쪽에 있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연침'''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연침은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으로 주로 침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일련의 자료들을 종합했을 때, 희정당은 ''''일상생활도 영위했던 편전''''으로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